바람의 열두 방향

StrayCat’s Randomness

주디스 버틀러, [젠더 트러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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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 전부터 친구들과 [젠더 트러블] 번역본을 가지고 세미나를 시작했다. (세미나라고 해도 책을 읽고 서로 질문거리를 주고 받으며 짧게 생각해보는 자리이긴 하지만.) 한 챕터씩 읽고 있다.

거의 고전과도 같은 이 책이 아주 최근 번역되었다는 것도 놀랍지만, 본문을 읽으면서 인상깊었던 것은, 여성주의와 여성운동 내에서 아주 ‘상식적으로’ 얘기되는 젠더,젠더의 본질, 젠더의 다양성, 젠더의 경계를 넘나드는 전복성 등의 개념이 그리 쉽게 나온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당위적이고 기본적으로 쓰여야만 할 것 같은 개념들도 실은 모두 이 같은 연구를 통해 고심해서 창조되었다는 것. 그리고 그것이 얼마나 견고한 가부장제를 무너뜨리기 위한 각고의 노력에서 나왔는지 알아야 할 것, 이런 것들이 새삼 떠올랐다. 여성학을 이미 공부한 사람들은 [젠더 트러블]을 통해 우리가 흔히 쓰는 ‘젠더’의 개념을 재조명해보고, 여성학을 이제 막 접하기 시작한 사람들은 [젠더 트러블]을 통해 여성주의가 상정하는 ‘주체’와 그 주체의 ‘정체성’ 문제가 어떤 것인지 함께 고민해 보는 기회를 가져도 좋겠다.

또한 섹스와 젠더 사이의 이분법을 문제시하면서 드래그쇼(Drag)를 ‘원본에 대한 모방’이 아니라 ‘모방에 대한 모방’이라는 것으로 지적한 것 역시 인상적이었다.사실 아는만큼 보인다고, 버틀러를 읽기 전에 니체, 푸코, 보부아르, 이리가레, 위티그 등의 저작을 차근차근 읽었다면 더 잘 이해할 수 있었을지도 모르겠다. [젠더 트러블]의 1장은 젠더와 섹스에 대해 다룬 기존의 이론들을 비평/비판하면서 논의의 토대를 세우고 있기 때문에, ‘본질의 형이상학(Metaphysics of substance)’라든가 ‘여성적 글쓰기(Ecriture feminine)’이라든가 하는 개념들을 미리 알고 있다면 좋을 것 같았다. 푸코는 대학교 3학년 애저녁에 결국 포기했고 이리가레와 위티그는 짧은 논문의 발췌문들만 읽어봤을 뿐이다. 물론 나는 학교 다니던 시절 이리가레의 이론에 대해 큰 감명(?)을 받았는데, 버틀러 등의 이론가들은 프랑스 페미니스트들의 ‘여성성에 대한 낭만화’ 작업을 문제적으로 삼으며 젠더의 ‘본질’ 문제를 다시 지적했고 이를 통해 매우 다른 관점을 알게 되는 것이 나에겐 흥미롭다.

한편으로 버틀러가 서문에서 ‘이것이 학문적인 저작이긴 하지만 14년 간 겪었던 레즈비언 커뮤니티, 레즈비언 운동의 맥락에서 나온 것이기도 하다’고 밝혀준 것이 고맙기도 하다. 사실 이론서들이 ‘현실’이나 ‘운동(activism)’과 괴리된다는 성급한 비난을 많이 받기도 하는 건 사실이지 않는가. 그러나 그런 성급한 비난은 결국 “그래서 뭘 어쩌라고?”라는 물음만 도출할 뿐이다. 운동을 하기 위해서는 비판적 사고와 그 사고를 표현할 수 있는 언어화된 능력이 필요하고, 이것을 위해서는 이론들이 뒷받침해주어야 한다. 이 책임에 대해 우리는 얼마나 쉽게 잊고 있는지.

*주디스 버틀러의 글이 난삽하기로 악명이 높긴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감스럽게도) 이 책에 나오는 몇몇 번역된 개념은 오해와 혼란의 소지를 불러일으킬 가능성이 매우 컸다. 조현준님의 이 책을 번역하느라 참 고생하셨겠다 싶기도 하지만, 오히려 원서를 보니 이해가 더 잘 되는 경우를 보면 매번 안타깝긴 마찬가지다. 나도 번역을 가끔 아르바이트로 하는 자이기 때문에 역자들의 노고를 이해하지 못하는 바 아니지만, 한편 ‘영어실력 자본’을 갖추지 못한 사람들이 어떤 이론이나 책에 대해 접근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은 분명 역자 및 역자와 함께 일하는 편집자의 몫이기도 하다. 문제는 그 역자가 괜찮은 조건에서 여유 있게 책을 번역할 수 있도록 해야 하는데, 현실은 그렇지 않다는 것.

**이 책에 나오는 개념들이 어렵다고 해서 또다른 역서들을 찾아 읽어볼 생각이라면 난 또 그것은 좀 말리고 싶다. -_-;; 특히 이리가레의 [하나이지 않은 성]은 동문선 번역판이 있을 텐데, 오역 투성이다. 위티그는 아예 책 자체가 없을 것이고. 아마 레즈비언 페미니즘 이론에 대한 책은 완역본이 거의 없다고 해도 무방할 것이다. 뭐, 팔려야 번역을 하든지 말든지 하지.

“이 책이 수행하는 주체의 탈구 작업에도 불구하고 여기에는 분명 어떤 사람이 있다. (…) 다양한 종류의 젠더를 만났으며, 나 자신이 그 몇 개의 젠더들의 교차점에 있다고 생각했고, 그 몇 가지 문화의 가장자리에서 섹슈얼리티와 만났다. (…) [젠더 트러블]이 학문적 저작이긴 하지만, 내게 이 책은 내가 내 삶의 여러 다른 면들을 연결시킬 수 있을까를 고민하며 레호보스 해변에 앉아 경계를 넘나들고 있을 때 시작되었다. 자전적 양식으로 글을 쓸 수 있다는 것이 나라는 주체의 위치를 바꾸는 것은 아니지만, 아마도 독자들에게 여기 어떤 사람이 있다는 위안감을 줄 수 있을 것이다.” (p.59, 개정판 서문)

(이 책의 문체가 어렵다는 비평에 대해) “(…) 어쩌면 이 같은 언어적 어려움을 경험함으로써 파생되는 어떤 가치가 있지는 않은가? 모니크 위티그가 주장했듯이 젠더가 문법적 규범을 통해 자연스러워지는 것이라면 가장 기초적인 인식 층위에서 젠더의 변화는 젠더가 주어지는 문법에 저항함으로써 일부나마 이루어지게 될 것이다. 명징성에 대한 이런 요구는 표면상 ‘분명한’ 관점을 작동시키는 책략들을 망각하고 있다. (…) ‘분명히 한다’는 기호 아래 떠도는 것은 무엇이며, 명징성이 생겼다고 할 때 어떤 비평적 의혹을 전개하지 못한 대가는 무엇인가? 누가 ‘분명히 한다’는 원안을 고안했으며, 그것은 누구의 이익에 봉사하는가? 모든 의사소통의 선결조건으로서 토명성이라는 편협한 기준을 고집함으로써 배제당하는 것은 무엇인가? 무엇이 ‘투명성’을 모호하게 만드는가?” (p.61-62, 개정판 서문)

“만일 어떤 사람이 ‘여성이다’라고 한다면 그것은 분명 그 사람의 전부가 아니며, 따라서 그 용어는 완전한 의미가 될 수 없다. 그것은 이미 젠더화된 ‘사람’이 젠더의 특정한 고유장치를 초월한 존재이기 때문이 아니라, 젠더는 다른 역사적 맥락 속에서 늘 가변적이고 모순적으로 성립되었기 때문이며, 담론적으로 성립된 정체성의 인종적, 계급적, 민족적, 성격, 지역적 양상들과 부단히 마주치기 때문이다. 따라서 ‘젠더’를 정치적, 문화적 접점에서 분리해내기란 불가능하다. 젠더는 늘 바로 그 접점에서 생산되고 유지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p.89, 1장 섹스/젠더/욕망의 주체들)

(여성의 보편성, 보편적 ‘여성’ ‘여성들’ 이라는 주체 상정에 대해) “나는 페미니즘 주체에 전제된 보편성과 통일성이, 주체가 작동되는 담론의 구속력 때문에 상당히 훼손되었다고 주장하려 한다. 실로 이음새 없는 여성의 범주로 생각되는 안정된 페미니즘의 주체를 어설프게 주장하게 되면 필연적으로 그 여성 범주를 받아들이는 데 적잖은 거부가 생기기 마련이다. 이런 배타적인 영역은 심지어 그 구성이 해방의 목적으로 면밀히 검토되었다 하더라도 그 구성의 강압적이고 규제적인 결과를 드러낸다. (…) 명백히 페미니즘의 정치적 과제는 (마치 그럴 수 있기라도 한 것처럼) 재현 정치학을 거부하는 것이 아니다.(…)마르크스의 말대로 이러한 비판의 출발점은 ‘역사적 현재(the historical present)’이다. 그리고 그 과제는 이렇게 구성된 틀 안에서 정체성의 범주에 대한 비판 논점을 명확히 하는 것이다.” (p.91-92, 1장 섹스/젠더/욕망의 주체들)

“(…)우선 섹스/젠더의 의미가 어떻게 주어졌는지 묻지 않고서 ‘주어진’ 섹스나 ‘주어진’ 젠더를 지칭할 수 있는가? 그렇다면 어쨌든 ‘섹스’는 무엇인가? 그것은 자연적인 것인가, 해부학적인 것인가, 염색체인가, 호르몬인가? 페미니즘 비평가는 그런 ‘사실들’을 우리에게 확인시키려는 과학 담론을 어떻게 평가할 것인가? 섹스에는 역사가 있는가? (…)성의 이원성이 어떻게 확립되었는지에 대한 역사는 있는가?” (p.97, 1장)

“이리가레가 남성적 의미화 경제의 인식론적, 존재론적, 논리적 구조를 드러냄으로써 페미니즘 비평의 범위를 넓힌 것은 분명한 사실이지만, 그녀의 분석이 미치는 힘은 바로 그 세계적 밤위 때문에 약화된다. 성차가 발생하는 문화 역사적 맥락의 배열을 횡단하는 독백적이고도 획일적인 남성적 경제를 규명하는 일이 가능한가? 특정한 젠더 억압의 문화 작용을 인식하는 데 실패하는 것이야말로 일종의 인식론적 제국주의가 아닌가? 문화적 차이들을 자기 동일적 남근로고스 중심주의의 ‘본보기’로 단순하게 설명해서는 개선될 수 없는 인식론적 제국주의 말이다. ‘타자’의 문화들을 세계적 남근로고스 중심주의의 다양한 확대 사례에 포함시키려는 노력은 일종의 전유 행위를 만든다. 그리고 이 전유 행위는 달리 말하면, 그 전체화된 개념이 문제시되었을 차이들을 바로 그 기호 아래 식민화시키면서, 남근로고스 중심주의의 자기 증식 제스처를 반복할 위험이 있다.” (p.109, 1장)

“연합의 ‘통일성’이 목표라고 미리 주장하는 순간부터 그 대가가 무엇이든 결속(solidarity)이야말로 정치적 행동의 선행조건이라고 가정하게 된다. 그러나 어떤 종류의 정치성이 이런 통일성을 사전에 전제하라고 요구하는 것일까? (…) 대화 가능성의 조건과 한계를 만드는 권력관계가 우선적으로 심문의 대상이 되어야 한다. (…) 완전해지기 위해서 다양한 인종, 계급, 나이, 민족, 섹슈얼리티라는 구성요소로 채워져야 할 ‘여성들’의 범주가 있다고 단순 가정하는 것은 오류일 것이다.” (p.112, 1장)

“젠더는 그 총체성이 영원히 보류되어서, 주어진 시간대에 완전한 모습을 갖출 수도 없는 어떤 복합물이다. 따라서 열린 연합은 당면한 목적에 따라 번갈아 제정되고 또 폐기되는 정체성을 주장할 것이다. 그것은 정의상의 완결이라는 규범적 목적에 복종하지 않으면서 다양한 집중과 분산을 허용하는 열린 집단이 될 것이다.” (p.114, 1장)

“여성이 ‘난 여자처럼 느껴져요(I feel like a woman)’라거나 남성이 ‘난 남자처럼 느껴져요’라고 말하는 경우에 그 주장은 의미 없이 과다한 (meaninglessly redundant) 표현이라고 보지 않는다는 전제가 깔려 있다. (…) 한 사람이 그 자신의 젠더가 되는 것은 그가 다른 젠더가 아닌 한에서, 즉 이원적 쌍 안에서 젠더 규약을 전제하고 강제하는 하나의 공식 속에서 가능하다. (…) 이 제도적인 이성애는 대립적이고 이분법적인 젠더 체계 안에서 가능한 경계를 구성하는 젠더화된 용어들마다 일의성을 요구하고 또 생산한다.” (p.126, 1장)

“젠더가 구성된다고 주장하는 것은 젠더의 허구성이나 인위성을 주장하기 위해서가 아니다. (…) 젠더의 특정한 문화적 배치가 ‘실재적인 것’ 대신에 자리잡고, 적절한 자기-당연시를 통해 자신의 헤게모니를 강화하고 확대한다는 점을 주장하고자 한다. 여성은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만들어진다는 보부아르의 주장에서 옮은 점이 있다면, 여성 자체가 과정 중에 있는 용어라는 것, 즉 시작하거나 끝난다고 당연하게 말할 수 없는 구성 중에 있다는 것, 되어가는 중에 있는 입장을 따른다는 것이다. (…) 젠더는 본질의 외관, 자연스러운 듯한 존재를 생산하기 위해 오랫동안 응결되어온(congealing) 매우 단단한 규제의 틀 안에서 반복된 몸의 양식화(repeated stylization of body)이자 반복된 일단의 행위이다. (p.147-148, 1장)

Written by 고동 vs StrayCat

2010/02/10 at 5:07 오후